인간이라는 이름의 단백질 덩어리로 산다는 것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독자 여러분께 작은 경고를 하나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다소 차갑고, 누군가에게는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하지만 이 차가운 관점이 역설적으로 어떻게 삶을 더 따뜻하고 자유롭게 만들었는지, 그 기묘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우리는 고장 난 기계인가?

사춘기 시절, 누구나 그랬듯 나도 꽤나 지독한 열병을 앓았습니다. 공부 성적, 친구 관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 “왜 나는 완벽하지 못할까?”, “왜 내 감정들은 이토록 제멋대로 일까?”

스스로를 몰아세우던 어느 날, 학원 선생님이 던진 농담 반 진담 반의 한마디가 내 머리를 때렸습니다. “너희가 공부하는 기계냐니? 기계가 이렇게 제멋대로면 그건 고장 난 거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엉뚱한 질문에 빠져들었습니다. 기계는 고장 나면 고쳐야 하는 것일 텐데, 인간의 제멋대로인 감정들은 고칠 수 없는 걸까? 인간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2. 감정은 그저 화학 반응이다

생물학 수업 시간, 나는 그 답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유전자… 교과서 속의 인간은 신비로운 영혼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생화학 기계였습니다.

어느 순간, 나는 일종의 타자화 화법을 터득했습니다. 나를 괴롭히던 우울과 분노를 나의 실체적인 문제가 아닌, 단순한 기계적 결함 쯤으로 분리해 낸 것입니다.

‘지금 화가 나는 건 실제 상황이 만든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아드레날린 수치가 튀었기 때문이니 우선 침착해야 한다.’

‘지금 우울한 건 세로토닌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화학 반응일 뿐이야.’

나의 모든 고통을 ‘단백질 덩어리들의 상호작용’으로 격하시키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차가운 방패였습니다.

3. 허무의 늪을 건너 만난 자유

하지만 이 사고방식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했듯, 인간이 그저 유전자를 운반하는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삶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남는단 말입니까?

고작 호르몬 펌프질에 울고 웃는 단백질 덩어리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니.

나는 감정의 파도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대신 짙은 회색빛 허무주의에 빠졌습니다. 슬픔도 의미 없지만, 기쁨 또한 의미 없다는 사실. 그것은 마치 불교의 해탈을 흉내 낸 어설픈 냉소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떨까요? 여전히 그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관점을 아주 조금 비틀었기 때문입니다.

4. 단백질이라서 느낄 수 있는 기적

과거의 내가 “인간은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야”라고 자조했다면, 지금의 나는 “인간은 단백질 덩어리 주제에 이런 것도 느끼네?”라고 감탄합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먼지에 불과한 입자들이 모여 잠시동안 ‘나’라는 형상을 이루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을 느끼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기계적인 화학 반응이라고 치부하며 낭비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현상 아닙니까?

삶에 거창한 목적이나 신성한 의무가 없다는 사실은 도리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고장 난 기계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정해진 답은 없으니, 내 몸안의 호르몬들이 기뻐하는 일을 찾아주면 그만인 것을요.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중 하나, ‘낙관적 허무주의’입니다.

나는 여전히 가끔 우울하고, 가끔은 화를 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들을 억지로 뜯어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낡은 단백질 기계가 오늘도 열심히 작동하고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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